"자, 두 사람 악수하고. 사이좋게 지내야지."
사실 대화의 방법론과 논쟁의 방법론이
어긋나기 시작한건
바로 이 시점이었을지 모른다.
어린 두 사람이 논쟁의
결론을 내지 못해서 육체적인 논쟁으로
이야기의 합의를 보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육체적인
논쟁을 발견한 그보다는 나이가 많은 사람
(대개 유치원 교사)들은 두 사람의
운동 행위를 강제로 중단시키고,
두 사람을 악수시킨다.
('사랑해요' 따위의 방금 전까지
거친 몸놀림을 보이던 이들에게서
찾기 힘든 단어들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논쟁
따위는 없어진 것처럼 두 사람을 행동하도록 한다.
논쟁의 이유를 기억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나이의 두 사람은
사실 이미 논쟁의 이유따위를 잊었기 때문에,
평화 협정을 맺는다.
동일한 논쟁거리가 다시 발생하고, 위의 사이클이 몇회 반복된다.
일단, 육체적인 논쟁에 대해서 그다지 찬성하지 않는다.
문제의 어느 부분도
해결하지 못하고,
복종하는 자와 복종시키는 자가 생기게 된다.
하지만, 어른들의 중재
방법이 이 사회의 많은 문제를 대변하는건 아닐까?
어른이 되고, 대학생이
되면서,
스스로 책임져야 할 부분들과, '내 생각'을 드러내야 할 부분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논쟁을 벌여야 할 경우가 늘어났다.
문제에
대한 상대방의 인식과 상대방이 그것을 대하는 방법과
자신의 방법을 비교하고 견주는
제대로 된 논쟁들보다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내는
논쟁이라 할 수 없는 대화들이 반복된다.
이러한 불쾌감의 발산은,
대충 덮는 걸로 이야기를 끝내고, 인간관계를 보존하는 것을
택하거나,
또는 대충 덮지 못해서 인간 관계를 끝내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이 곳은, 관계가 무너지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공간이다.
결국,
어느 누구도 제대로 논쟁하려 하지 않는다.
이전의 방법을 따라가는 것이 선택되고,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는 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퍼뜨리지 못하고,
서로의 주장을 정확히
이해하고, 논리와 합리로
가장 좋은 길을 찾기보다는,
머릿수가 많은 쪽이 머릿수가
작은쪽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된다.
가장 쉬운 방법으로 어느 누구도 논쟁할 필요가
없는 사회 구조
-계급사회-를 선택하기도 한다.
논쟁이라 불리우는 것들의 많은
수는
서로를 비꼬고 분노시키고 무리한 비판을 가한 끝에,
서로 대화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만들고 만다.
왜 우리는 어린 아이들에게 화해를 강요할까?
그것이 어른들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생각이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그래서
논쟁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는
어른들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먹 싸움은
중단시키자,
하지만, 왜 그들이 싸우기 시작했는지
파악하도록 하고, 기억하도록 하고,
서로가
싫어하는 것과 자신이 잘못한 것과
상대방이 잘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도록 하자.
그들이 제대로 된 논쟁의 틀 안에서 끝까지 싸우게 하고
문제를 덮고
넘어가지 않도록 하자.
눈감지 않는 용기를 가지게 하자.



